최근에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사형을당한 김재규부장에대한 재심이 결정됐습니다.
모르시는분들이 많을텐데요.
김재규는 어떤사람?

많은분들은 김재규를 막연히 대통령을 살해한 패륜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김재규라는 인물은 단순 살인자라기보다 굉장히 고뇌가 많고 나라를 사랑했던
인물이었다라는 평도 많이 있습니다.
그는 박정희와 고향이 같은 구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김형철은 정미소를 운영할 정도로
굉장히 돈이 많은 지주였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구미에서 번돈으로 학교도 지어주고 나름 평판도 좋았다고 하네요.
김재규와 박정희의 만남
해방후 46년도에 육사 2기로 입학을 하는데 거기서 같은 기수이지만 나이가 9살이나 많은
박정희를 만납니다.
김재규는 국방부 총무과장 재임중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테타를 맞게되는데요.
사실 김재규는 5.16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5.16은 육사2기생과 8기생들이 주도했지만 김재규는 주세력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던거죠.
박정희와 동향이고 동기이지만 군대 안에서 그리 친했던거 같지는 않습니다.
5.16후 2기생 중에는 '한웅진 소장'과 '한신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위원'으로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한웅진소장이 박대통령에게 동기생들을 많이 발탁할것을 추천했지만 박정희는
"동기생이면 다 동기생이냐? 동기생을 불러들이면 동기생만 쓴다고 욕을먹게..."하고
거절했다고 하네요.
동기생들보다는 부리기 쉬운 처조카 김종필이 주도한 8기생들이 아무래도 만만했던거 같습니다.

김재규를 시험해보는 박정희
1961년 5.16이 터지고 정확히 한달이 지나고 6월16일 김재규를 뜬금없이
건설중인 호남비료 사장으로 보내는데 나주에 호남비료는 건설이 지지부진 했었습니다.
김재규는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신분에서 지지부진하던 호남비료 사장에 취임하고 무려
건설공사를 1년이나 단축시켜서 완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박정희의 완벽한 신임을 얻는데는 성공합니다.
김재규를 완벽히 신임한 박정희는 그제야 6사단장으로 김재규를 앉힙니다.
여기에 감동받은 김재규는 이때부터 박정희정권의 성공을위해 한목숨 받칠것을 다짐합니다.

그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대한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터질때 김재규의 6사단이 완전무장을 하고
서울로 출동도합니다. 계엄은 선포된 상태이구요. 이게 김재규의 원죄이긴합니다.
이때 박정희도 김재규를 무한신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972년 박정희가 유신선포를하고 국회를 해산한 다음 '유정회'라는 어용 국회의원 단체를 만듭니다.

그리고 평생 군인의 길만을 걷고싶었던 김재규도 박정희의 권유로 어쩔수없이 군복을벗고 유정회 국회의원이 됩니다.
김재규의 증언에 따르면 임명직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을 정말 하기 싫었다고 하네요.
이때부터 김재규는 박정희를 끌어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합니다
이런 불만을 박정희도 눈치챘는지 김재규에게 고약한 테스트를 합니다.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김재규를 복직시킨겁니다.
그러나 윗 상사가 김재규의 부하로 있었던 '신직수'였기때문에 상하관계가 역전된겁니다.

김재규가 모셔야할 상사가 군 후배였던 신직수였으니 김재규 입장에서는 모멸감을 느꼈고
박정희는 일부러 김재규를 먹였던 겁니다.
김재규! 박정희 암살을 결심하다!
김재규는 그날 이후 심한 모멸감으로 과음도하고 굉장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왕 자신이 좋아하는 군에 다시 들어간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고 하네요.
박정희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김재규가 열심히 하자 그당시 공석이었던 건설부장관 자리에 김재규를 앉힙니다.

박정희는 의심이 많아 항상 부하들의 충성도를 테스트하고 그랬던거 같습니다.
사실 지금이야 건설부의 위상이 크지만 70년대까지만해도 건설부장관은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처럼 큰 건설회사도 없었고 그때는 경공업을 위주로 했던 시대였죠.
김재규는 건설부장관 취임식때 임명장을 받는 순간 권총으로 쏴 죽일 생각을 했다고 하네요.
실제 권총도 준비했었구요.
그러나 자신의 취임식에서 너무나 헤맑게 웃고 자신을향해 걸어오는 박정희를 향해 총을 쏠순 없었다고 합니다.
주위에 다른 임명장을 받는 장관들도 너무 많았구요.
그는 검찰 조사에서 박정희를 시해하려했던 순간은 한순간이 아니다 훨씬 더 많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박정희 암살의 트리거! 부마항쟁
그러다 김재규의 이런마음에 트리거 역할을하는 큰 사건이 터집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공업이 주 산업이었고 대표지역이 부산과 마산에 몰려있었습니다.
그런데 78년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가 폭망을하자 부산과 마산경제도 폭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신체제반대를 외치며 부산대학생들이 먼저 들고일어났고 폭망한 경제로 시민들또한 못살겠다며
동참해 부산과 마산에서 큰 시위들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부마항쟁'입니다.




박정희는 급히 김재규를 내려보냈는데요.
김재규가 헬기를타고 밑에를 내려다보니 반정부 시위가 엄청 발생하고
여론이 굉장히 심상치 않다는걸 깨닷고 사실대로 박정희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나 역시 박정희는 '이것은 사회주의 전복불순 세력들의 주동'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차지철도 "캄보디아는 300만명을 깔아 뭉갰는데 멀쩡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100만 정도를 총으로
쏴 가지고 다 죽여버립시다"며 동조를 하자 김재규는 박정희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차지철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만약에 시위가 서울에서 발생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김재규는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막지않으면 4.19든 뭐든 그것을 뛰어넘는 대학살이 벌어질거라 생각하고 자신이
이걸 멈춰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 합수부의 '김재규 악마화'
사실 10.26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술마시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닙니다.
김재규는 철저히 계산했고 자신이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에게 총을 날리고 제거하면
유신체제에 억눌렸던 전 국민들이 다 일어나서 자신을 호응해 줄거라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지미카터'정권 또한 박정희의 핵개발과 인권을 거론하면서 박정희를 견제했기에
박정희를 제거하면 미국도 내 편을 들어줄것으로 생각했죠.
그러나 박정희가 죽자 막상 국민들의 여론도 박정희에대한 동정론이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이유로는 그 사건을 조사한 전두환 합수부장의 김재규 악마화도 한몫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김재규를 대통령병에걸린 정신병자 정도로 취급했고 언론도 그에 장단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사실 재판과정에서 김재규의 변호인인 '안동일변호사'나 재판을했던 대법원 판사중 한명인 '양병호판사'등은
김재규가 자신이 대통령이되기위해 박정희를 시해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윤보선 전대통령', '김수환 추기경'도 수없이 탄원서를 냈구요.
이러한 많은 노력에도 김재규는 결구 사형을 당했지만 이번에 재심이 이루어지니 그의 억울한 죽음에대한 진실이 지금이라도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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